신비한 블루의 연잎
박영택
2022
남상운의 그림은 연잎을 그린 재현회화이자 동시에 푸른 색상으로만 칠해진 색면추상과도 같다.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하고 홀연 눈부시고 신비스러운 블루 색감의 덩어리가 밀고 나오거나 혹은 까맣고 짙은 후경 속으로 그 원형의 형태가 빠져나가는 듯한 환영을 자아내는 그림이다. 얇고 납작한 캔버스 표면을 경계로 이루어지는 이 시각적 착시는 화면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절개하면서 뒤덮고 있는 파란 색의 원형 혹은 타원형의 형상 및 심도 깊은 검정색의 배경을 사이로 번갈아 일어 난다. 동시에 파란색 덩어리는 잎맥과 주름, 그리고 그 연잎의 중심(일종의 옴파로스)에 투명한 물방울을 거느리면서 실재하는 연잎의 사실적인 재현으로도 다가온다. 이 정교한 재현술은 실재 연잎 색채와의 배리, 충돌을 통해 ‘언캐니 한 감각’을 발생시키고 기이한 환상이나 몽환적인 정서를 자극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실재 연잎일 수도 있지만 실재는 아니다. 그림으로만 가능한 연잎이고 작가에 의해 허구로 연출된 연잎이자 상상된 연잎에 해당한다. 그림이란 ‘주어진 화면에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장치’라고 말해볼 수 있다. 회화가 이미 존재하는 외부 세계를 재현한다 해도 그 결과물은 그려진 것이고 물감과 붓질 등에 의해 연출된 그 무엇이다. 물감과 붓질, 질료와 신체적 행위일 뿐이다. 그러니 완벽한 재현이나 실재 그 자체로서의 그림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다. 문제는 그림이, 환영이 우리에게 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상운은 커다란 접시와도 같고 달과도 같은 연잎을 화면에 부분적으로 채워 넣었다. 풍경에서 절취되어 나온 단독의 연잎은 가능한 자신의 존재성을 극대화하면서 바깥으로 확장되어 펼쳐진 어느 순간의 상황을, 생의 한때의 절정을 숨이 막히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완벽한 상태로 충만하게 부풀고 확산 해 팽창된 순간을, 혹은 제 생의 궤적을 그려나가 이룬 영역을 죄다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중심부에서 사방으로, 방사형으로 펼쳐 나가는 잎맥의 선들은 연잎의 조직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생명의 힘이나 기운이고 에너지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선의 궤적이 보다 예민하고 기운생동하듯이 질주해나가는 힘, 기세가 되어야 한다. 한편 연잎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연잎의 배꼽 자리에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투명한 물방울이 감각적으로 놓여 신선하게 빛나면서 청색으로 물든 화면에 모종의 구멍을, 여백을 만들거나 화면/피부에 악센트를 만든다. 약간씩 위치를 바꾸면서, 물방울의 크기를 달리하면서 그것들은 다르게 놓이기도 한다. 나로서는 연잎의 중심부에 방울처럼, 보석처럼 부풀어 올라 단호하게, 결정적으로 하나로 놓이는 것이 가장 힘이 있고 효과적으로 보인다.
 
남상운은 연잎을 소재로 취했다. 연蓮은 한국전통문화 속에서 풍성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도상이자 상징에 속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연꽃은 ‘청정淸淨’, ‘불염不染’, ‘초탈超脫’, ‘부처의 탄생’의 상징물이자 속세를 밝히는 진리를 상징하고, 유교에서는 청렴과 군자를 상징하며 동시에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게 사는 은일지사隱逸之士를 의미한다. 한편 도교에서 연꽃이 신선의 지물持物로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민간에서 연꽃은 불교나 유교적인 의미와는 달리 ‘다산’, ‘행복’, ‘풍요’, ‘평화’, ‘생명창조’ 등 길상적 의미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통미술에서 연/연꽃은 다양한 의미망을 거느린 매우 익숙한 도상이자 친근한 회화적 소재였는데 이는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연한 기회에 연을 재발견한 작가는 연이 지닌 여러 도상적 해석과 함께 개인사적인 추억과 결부된 그것을 상당히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허구적이고 몽환적인 존재로 연출해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실재하는 연잎이자 허구이고 가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로인해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의 교차와 겹침에서 오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이 그림에서 보다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다른 작가들의 연 그림과 구분되는 독특한 지점일 것이다. “가상은 실재만큼 견고하고, 실재는 가상만큼 유령스럽다.” 사실 우리가 보고 인지하는 이 현실이란 명확하고 객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동시대 기술이 모두 가상의 것을 실재의 영역으로 급속히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현실은 그저 현실에 대한 믿음에 기반할 뿐이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각자의 믿음에 기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재현은 그렇기에 매우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오늘날 미술은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재현과 비재현의 구분이 무의미한 지점에서 출몰한다.
 
남상운의 연잎 그림은 재현이면서도 허구적 이미지에 해당한다. 온통 블루로만 그림을 그리고 또한 연잎에 허구의 물방울을 얹혀놓아 중력의 법칙과 시간성, 역동적인 상황의 개입이 작동하는 듯한 장면을 그려놓고 있는 데서 그 같은 허구는 이루어진다. 작가가 그린 청색의 연잎과 그 안에 담긴 물방울 등이 죄다 연출된 가상의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외부세계의 대상을 참조하되 그로부터 벗어나 일정한 왜곡, 변형, 편집의 과정 등이 개입하면서 그림을 현실로부터 부단히 이탈해서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이처럼 작가의 화면은 무엇보다도 투명하고 매혹적인, 몽환적인 블루로 흠뻑 적셔져 있다. 사실 파란색 그 자체가 그림의 핵심이다. 작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잎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그것은 연잎 같지만 매혹적이고 눅눅한(무르며 부드러운), 이상한 덩어리, 그 무엇이다.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허용하게 해주는 매개다. 깊게 가라앉아 침전되는 색채이고 눅눅하고 그러면서도 청아한 색조인 블루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고 그래서 신성한 색, 영원한 색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공간이 깊어지면서 모든 색은 블루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무한한 차원’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색, 현혹하는 색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공상적인 이야기나 요정 이야기를 흔히 ‘파란색 이야기’(contes bleus)라 부르며 희귀하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존재를 ‘파랑새’(oiseau bleu)로 표현하기도 한다. 1775년에 ‘코발트블루’라는 이름의 새로운 파랑이 생산되었는데 이는 ‘코발트블루’는 코발트 광석에서 얻어졌다. ‘코발트’라는 이름은 ‘Kobold(요정)’에서 유래되었다. 캄캄한 탄광 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코발트가 꼭 요정의 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발트 블루를 즐겨 다루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반 고흐(van Gogh)다. 그는 그 색을 매우 신성한 파랑으로 만든 이다. 한편 칸딘스키는 「예술의 정신성에 관하여Uber as Geistige in der Kunst」라는 글에서 “파랑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고 썼다. 이처럼 화가들이 특정 색을 의도적으로 다루는 일은 자신의 온몸으로, 감각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일이다.
 
남상운은 결국 신비롭고 신성하며(한) 가상의 상태를 블루라는 색상을 빌어, 그리고 음을 상징하는 달을 연상시키는 연잎의 둥근 원형의 형태와 결합해 내면서, 그리고 유화물감의 점성을 죽이고 습성의 상태로 만들어 모든 것을 흡입해내면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 결과 그의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가로지르며 연잎이면서도 그것과는 무척이나 다른 낯선 또 다른 존재를, 관능적으로 흔들리며 다가오는 이상한 색채 덩어리를 안겨준다.
그로 인해 이 작가가 재현한 연/연잎은 기존 한국미술 속에서 빈번하게 접했던 익숙한 연 그림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특이한 감각을 발산하고 있다. 지나치게 익숙한 연에 관한 도상학적 해석이나 의미의 맥락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관습적인 기호에 기우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연잎 자체를 사실적으로만 재현하는 것도 아닌 자리에서 기이하게 자리한 그림이다. 재현과 가상의 사이에서,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런 연잎이 신비스럽게, 눈이 시리게 푸른 덩어리로 유동한다.
 

실재계와 상상계 사이에서
강홍구
2021
1.
남상운에게 연(蓮)은 실재이자 상상이다. 현실이자 가상이며 어쩌면 그 둘 다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한 작가에게 하나의 테마, 혹은 집요하게 탐색해야 할 소재가 찾아오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남상운의 작업 속의 연은 그 청정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난 시절의 힘든 기억과 가난한 환경에 대한 현실에서 왔다. 그는 어린 시절 비닐하우스에 살면서 꽃을 재배 하는 집안 일 을 도왔고 맘껏 놀지 못했던 그 때의 기억이 일종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연은 그 비닐하우스 근처의 연못에 있던 것이나 아닐까 싶다.
비닐하우스는 일종의 가짜 자연 환경이다. 늘 계절을 앞서가기 위해서 온도를 높이고, 습도를 조절해서 꽃들을 일찍 피워야 한다. 이렇게 피어난 꽃들은 진짜이지만 계절을 앞서간 인위적인 인공물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가짜이기도 하다. 진짜이면서 가짜이고 둘을 구분하기 힘든 세계는 비닐하우스의 꽃 말고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2.
그가 그린 연은 그 현실과 가상 사이에 펼쳐진 블루 스크린(Blue screen)이다. 초기에는 녹색의 연잎과 그 위를 구르는 물방울이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적 기법으로 그려졌었다. 불필요한 것은 모조리 제외한 미니멀한 묘사가 그 특성이었다. 거기에는 되도록 감정도 배제되었고 연잎, 풀잎이나 그림자, 그리고 연잎 위의 물방울이 전부였다. 그걸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보는 사람의 자유였다. 아직 그 작업들은 연잎에 특별한 스토리를 부여하기 이전의 작업들이었다.
그 이후 그의 작업 속 연잎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에 관해 배우인 아들의 촬영 현장에서 본 블루 스크린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블루 스크린은 연기자가 행위 하는 배경이며 그 배경에는 다른 이미지들이 덧붙여져 한 장면이 완성된다. 그 배경에는 CG가 들어갈 수도 있고 현실 장면이 겹쳐질 수도 있다. 즉 무한한 가능성이자 동시에 가상적 공간이 된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보는 드라마와 영화 또한 가짜이자 진짜이다. 이른바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뒤섞는다.
 
 
3
남상운에게 연잎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어린 시절 보았던 연잎은 진화를 거듭해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작가는 ‘연잎은 실제와 환영이 겹쳐있는 현대인이 사는 세상이며 만들어진 허구의 유토피아’ 라고 말한다. 물론 유토피아는 본래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린 연잎은 단지 이미지로만 실재하는 가상이 된다. 이 가상적 유토피아는 그가 꿈꾸는 세계이며 일종의 이상향이다. 그리고 거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가 연잎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꽃을 가꾸는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는 아니었다. 아마도 우연히 비닐하우스 근처에 있는 연못의 연잎을 바라보고 만지고 놀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이지만 가상인 연잎은 인공자연이 아닌 세계이다. 아무도 연을 대량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인공재배 하지 않는다. 연은 일종의 현실계이다.
 
4
연처럼 텍스트성이 복잡하고 레퍼런스가 많은 꽃도 드물다. 물론 연잎에 관해서 라기 보다는 연꽃에 관해서이지만 멀리는 이집트 벽화의 그림부터 불교와 민속 신앙, 한자 문화권의 문학에 이르는 전 분야에서 관심의 대상인 꽃이다. 불교에서는 연꽃이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의미하며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꽃으로 쓰고 있다. 극락세계를 달리 부를 때에 ‘연방(蓮邦)’이라고 한다든지,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태(蓮態)’라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부처가 앉아 있는 대좌를 연꽃으로 조각하는 것도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남상운의 연꽃 아닌 연잎에는 부처 대신 물방울이 구르고 자동차가 굴러간다. 물방울은 자연 또는 자아 정도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고, 초창기 그림 속의 무당벌레를 대신해 굴러가는 자동차는 작가가 가진 세속적 욕망의 표현이다. 불교의 유토피아인 극락은 이 세상에는 없는, 저 세상의 것이다. 남상운의 연잎도 하나의 상징계로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 그 이미지 위에 나타난 칠점박이 무당벌레 같은 자동차는 작가의 욕망이자 우리 모두의 그것이다. 즉 그의 세속성이 연잎이라는 상징계 위에서 하나의 실재계를 이루는 것이다.
 
5
자끄 라깡( Jacques Marie Emile Lacan)의 욕망 이론을 빌자면 남상운의 연잎이 이루는 회화의 세계는 당연히 상징계이다. 그 상징들은 역사적, 문학적 레퍼런스와 인용들로 이루어져 있고 동시에 도달 할 수 없는 모순들로 차 있다. 그 모순의 대표적인 것들이 연잎/ 외제 자동차/ 강태공(姜太公) 들이다. 연잎은 현실이자 가상적 상징계이고 외제 자동차는 물질적 욕망을, 동시에 등장하는 강태공은 갈등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유유자적 하고 싶은 심리적 욕구를 의미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시와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쪽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이미지는 복잡한 현실 세계로 부터의 도피, 혹은 한가함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불교, 블루 스크린, 현실/ 현실적 욕망/심리적 욕망이 짝을 이루는 이 현상은 라깡식으로 말하면 도달할 수 없는 실재계이다.
라깡에 따르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서,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자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세계다. 실재계는 때로 환각으로 때로 광기로 드러나기도 하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달할 수도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원초적 욕망인 실재계는 그러므로 욕망의 귀착점이다. 욕망의 귀착점이지만 도달 할 수 없으므로 실재이면서 동시에 부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실재계이지만 상상계인 것이다. 유아들이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미지를 아는 상상계적 인식이 남상운의 작업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상운 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의 숙명이기도 하다.
 
6
최근 남상운의 작업은 연잎을 그리는 방식이 좀 달라졌다. 동양화적 기법을 동원한 듯이 선염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물감이 가진 물질적인 사항들을 약간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서 내버려 두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의 분위기들은 서양적인 것에서 벗어나 문인화적 세계로 접근해간다. 그런 분위기는 주희(朱熹)의 애련설(愛蓮說)이나 한시 속의 연꽃들에 대한 예찬에서 묘사 되던 것들이다. 이로 인해 어쩌면 그의 작품의 텍스트의 해석 가능성은 좀 더 풍부해졌고 바라보기도 편해졌다. 물론 연잎을 구르는 물방울이나 자동차들은 환영적이다. 그리고 그 환영의 상징성은 화면 전체에 평온한 기분을 가져다준다. 어쩌면 상상계와 실재계 사이의 화해가 상징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어느 날 무심히 바라본 저수지에 흐트러진 연잎의 풍경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일어나는 체험적 공감이 그 계기일 수도 있다.
남상운의 연은 그의 작품 제목이 말 하듯 블루 문(Blue moon)이다. 블루 문은 우울한 분위기를 의미 하지만 그의 작업은 그 우울함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벗어나서 쪽배를 타고 동양적 상상계의 물 위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 배 위에 무당벌레 같은 자동차도 한 대 실려 있기를 빌기로 하자. 상상과 상징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세계도 한 번쯤은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연蓮이 왔다
문성준
2017
연蓮이 떴다. 혼자.
 
연蓮이 왔다. 달이 뜨듯이, 네가 오듯이.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다가오고, 불현듯 삶이 된다. 그림도 그렇다. 내게 남상운 작가의 그림이 그랬다면, 아마 작가에게는 연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친 모든 것이 삶이 되지는 않듯, 다가온 모든 것이 그림이 되지는 않는다. 삶은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이 작가의 세계를 훑고 갔을 테고, 대부분은 그저 흘러갔을 테지만, 게 중 어떤 것들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흔적은 언제나 그렇듯 때론 상처가 되어 흉터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 흉터를 보듬는 무언가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연은 아마 그 둘 사이 어디 즈음에서 만난 무엇이었을 테다. 그리고 작가란, 그런 무엇을 무엇이 아니게 만드는 사람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관계가 비단 작가에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무엇이든, 인간은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을 그릴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무능력은 바로 그 무능력함 덕분에 세상을 의미로, 즉 “사물”이 아닌 “사실”로 가득 채워 넣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림에서는 “소재”다. 남상운 작가에게 연이라는 소재는 그런 의미의 세계이다.
연은 홀연히 그의 삶에 들어와 자리하여 의미가 됐을 것이다. 연이 앉은 자리의 이름이 무엇인지야, 아무도 모른다. 작가 본인 외에는.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작가가 그러하듯 작가 본인도 그게 무엇인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우리는 연이 앉은 자태 정도는 볼 수 있고, 이 자태를 통해 그림을, 즉 작가의 사실 세계를 조금 들여다볼 수는 있다. 그림을 조금 너그럽게 만들어 주는 것,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그림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앞선 “소재”와 만나 그림이 된다.
 
그럼 연이 앉은 자태를 보자. 캔버스에는 푸른 연잎 하나가 가득 차 있지만, 연은 본디 홀로 피는 생물이 아니다. 못[潭]에서 서로 의지하여 못의 더러움을 이겨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얽히어 피어난다. 대신 마침내 피어나면 저뿐만 아니라, 제가 핀 세상, 즉 못도 바꾸어버린다. 그리하여 못은 연못이 된다.
그러나 작가의 연은 혼자다. 꽉 차오른 달처럼 혼자다. 이 고독을 어떻게 감당할 셈인가? 우리는 이 외로움에 떠밀려 누군가에게 스며들고 말지만, 작가는 반대다. 그 외로움을 밀어붙이고 밀어붙여 세상을 가득 채워버린다. 무릇, 작가란 그런 종류의 인간임을, 그의 그림을 보고 상기한다. 예술이니 예술가니 허울 좋은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상운이라는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는 단지 스며들어 ‘우리’가 되려 하지 않고 홀로 가득 차 ‘나’로 남으려 한 사람임을, 어쩌면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임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회에 어수룩한 사람들은 그 존재 방식을 예술처럼 시대착오적인 외침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연못을 만들지 않는 작가의 연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저 오롯이 자기가 자기로 남으려 할 뿐이다.
이것은 연잎 위 물방울에서도 보인다. 물방울은 자신의 세상인 연잎에 스며들지 않는다. 당연하다. 연잎에 스며들면 그건 더 이상 물방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방울이 물방울이기 위해서는 홀로 견뎌야 하고, 홀로 고독해야 한다. 그리고 물방울은 고독해지면 고독해질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이것이 물방울의 유일한 존재 방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연은 물방울이 물방울일 수 있도록 세상이 되어준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그리고 아버지가 된 작가처럼, 연은 물방울의 세계가 되어준다. 인류가 여태 그렇게 살아왔듯이 연은 아버지이며 동시에 작가 자신이다.


하지만 세상에 스미지 않는 버팀이 쉬운 일은 아니다. 탄탄히 자기를 쌓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속에 나로 남지 못한다. 이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인내가 필요한 일이고, 그러므로 애착이 필요한 일이다. 삶에 대한, 자신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애당초 가능치 않은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애착이 지층처럼 쌓이듯, 그래서 시간을 이겨내듯, 한 겹 한 겹 쌓아 올려져 유적처럼 완성된 작품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순간이 부분으로 완성되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라 부르는 것은 그다지 적절한 지칭이 아니다. 차라리 그의 그림은 염료가 천에 번지듯, 삶이 자신에 스미듯, 염색하듯, 물들이듯 쌓여가는 그림이다. 삶의 삶이기 위해서는 삶 전체를 이루는 시간이 필요하듯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되는 그림이다. 그러므로 보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 그림이다.
마치 내가 내가 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허나, 앞서 말했듯 이런 긴 버팀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작가의 그 시간에 우울이 스며들었나보다. 가득 찬 연은 그 존재의 충만한 만큼이나 우울을 제 몸 안에 가득 채웠다. 이것은 그의 전작인 촬영장 그림에서도 보였던 방식이다. 영화 세트장의 공허함, 즉 화려함의 이면을, 그는 보란 듯이 우울한 블루로 채워 넣었다. 화려한 그래픽이 덧입혀지겠지만 실은 공허한 촬영장 블루 스크린의 그 우울 말이다. 대신 이번 작품에서는 그 허상을 연이 대체했을 뿐이다. 가득 찬 달이 된 연은 가장 오래된 블루 스크린처럼 우울을 떠올린다.
하지만 달 없이는 살 수 없다. 물리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달이 만들어주는 허상-이야기 없이는 살 수 없다. 허상이 허상인 줄 알면서도 허상이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다. 말이 사랑을 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연인처럼 말이다. 인간의 원죄일지도 모를 이런 존재 방식이 그의 그림에 푸른 달을 띄운다. 그리고 그는 그 달 아래서 자신의 존재를 모색한다.
 
앞으로 그의 모색은 어디로 갈 것인가?
캔버스 천에 쌓인 푸른빛이 하나의 색면으로 자신의 몸을 확장시키는 것처럼, 그의 그림도 어디론가 갈 것이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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