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운의 그림은 연잎을 그린 재현회화이자 동시에 푸른 색상으로만 칠해진 색면추상과도 같다.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하고 홀연 눈부시고 신비스러운 블루 색감의 덩어리가 밀고 나오거나 혹은 까맣고 짙은 후경 속으로 그 원형의 형태가 빠져나가는 듯한 환영을 자아내는 그림이다. 얇고 납작한 캔버스 표면을 경계로 이루어지는 이 시각적 착시는 화면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절개하면서 뒤덮고 있는 파란 색의 원형 혹은 타원형의 형상 및 심도 깊은 검정색의 배경을 사이로 번갈아 일어 난다. 동시에 파란색 덩어리는 잎맥과 주름, 그리고 그 연잎의 중심(일종의 옴파로스)에 투명한 물방울을 거느리면서 실재하는 연잎의 사실적인 재현으로도 다가온다. 이 정교한 재현술은 실재 연잎 색채와의 배리, 충돌을 통해 ‘언캐니 한 감각’을 발생시키고 기이한 환상이나 몽환적인 정서를 자극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실재 연잎일 수도 있지만 실재는 아니다. 그림으로만 가능한 연잎이고 작가에 의해 허구로 연출된 연잎이자 상상된 연잎에 해당한다. 그림이란 ‘주어진 화면에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장치’라고 말해볼 수 있다. 회화가 이미 존재하는 외부 세계를 재현한다 해도 그 결과물은 그려진 것이고 물감과 붓질 등에 의해 연출된 그 무엇이다. 물감과 붓질, 질료와 신체적 행위일 뿐이다. 그러니 완벽한 재현이나 실재 그 자체로서의 그림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다. 문제는 그림이, 환영이 우리에게 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상운은 커다란 접시와도 같고 달과도 같은 연잎을 화면에 부분적으로 채워 넣었다. 풍경에서 절취되어 나온 단독의 연잎은 가능한 자신의 존재성을 극대화하면서 바깥으로 확장되어 펼쳐진 어느 순간의 상황을, 생의 한때의 절정을 숨이 막히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완벽한 상태로 충만하게 부풀고 확산 해 팽창된 순간을, 혹은 제 생의 궤적을 그려나가 이룬 영역을 죄다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중심부에서 사방으로, 방사형으로 펼쳐 나가는 잎맥의 선들은 연잎의 조직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생명의 힘이나 기운이고 에너지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선의 궤적이 보다 예민하고 기운생동하듯이 질주해나가는 힘, 기세가 되어야 한다. 한편 연잎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연잎의 배꼽 자리에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투명한 물방울이 감각적으로 놓여 신선하게 빛나면서 청색으로 물든 화면에 모종의 구멍을, 여백을 만들거나 화면/피부에 악센트를 만든다. 약간씩 위치를 바꾸면서, 물방울의 크기를 달리하면서 그것들은 다르게 놓이기도 한다. 나로서는 연잎의 중심부에 방울처럼, 보석처럼 부풀어 올라 단호하게, 결정적으로 하나로 놓이는 것이 가장 힘이 있고 효과적으로 보인다.
남상운은 연잎을 소재로 취했다. 연蓮은 한국전통문화 속에서 풍성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도상이자 상징에 속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연꽃은 ‘청정淸淨’, ‘불염不染’, ‘초탈超脫’, ‘부처의 탄생’의 상징물이자 속세를 밝히는 진리를 상징하고, 유교에서는 청렴과 군자를 상징하며 동시에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게 사는 은일지사隱逸之士를 의미한다. 한편 도교에서 연꽃이 신선의 지물持物로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민간에서 연꽃은 불교나 유교적인 의미와는 달리 ‘다산’, ‘행복’, ‘풍요’, ‘평화’, ‘생명창조’ 등 길상적 의미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통미술에서 연/연꽃은 다양한 의미망을 거느린 매우 익숙한 도상이자 친근한 회화적 소재였는데 이는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연한 기회에 연을 재발견한 작가는 연이 지닌 여러 도상적 해석과 함께 개인사적인 추억과 결부된 그것을 상당히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허구적이고 몽환적인 존재로 연출해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실재하는 연잎이자 허구이고 가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로인해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의 교차와 겹침에서 오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이 그림에서 보다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다른 작가들의 연 그림과 구분되는 독특한 지점일 것이다. “가상은 실재만큼 견고하고, 실재는 가상만큼 유령스럽다.” 사실 우리가 보고 인지하는 이 현실이란 명확하고 객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동시대 기술이 모두 가상의 것을 실재의 영역으로 급속히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현실은 그저 현실에 대한 믿음에 기반할 뿐이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각자의 믿음에 기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재현은 그렇기에 매우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오늘날 미술은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재현과 비재현의 구분이 무의미한 지점에서 출몰한다.
남상운의 연잎 그림은 재현이면서도 허구적 이미지에 해당한다. 온통 블루로만 그림을 그리고 또한 연잎에 허구의 물방울을 얹혀놓아 중력의 법칙과 시간성, 역동적인 상황의 개입이 작동하는 듯한 장면을 그려놓고 있는 데서 그 같은 허구는 이루어진다. 작가가 그린 청색의 연잎과 그 안에 담긴 물방울 등이 죄다 연출된 가상의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외부세계의 대상을 참조하되 그로부터 벗어나 일정한 왜곡, 변형, 편집의 과정 등이 개입하면서 그림을 현실로부터 부단히 이탈해서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이처럼 작가의 화면은 무엇보다도 투명하고 매혹적인, 몽환적인 블루로 흠뻑 적셔져 있다. 사실 파란색 그 자체가 그림의 핵심이다. 작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잎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그것은 연잎 같지만 매혹적이고 눅눅한(무르며 부드러운), 이상한 덩어리, 그 무엇이다.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허용하게 해주는 매개다. 깊게 가라앉아 침전되는 색채이고 눅눅하고 그러면서도 청아한 색조인 블루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고 그래서 신성한 색, 영원한 색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공간이 깊어지면서 모든 색은 블루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무한한 차원’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색, 현혹하는 색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공상적인 이야기나 요정 이야기를 흔히 ‘파란색 이야기’(contes bleus)라 부르며 희귀하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존재를 ‘파랑새’(oiseau bleu)로 표현하기도 한다. 1775년에 ‘코발트블루’라는 이름의 새로운 파랑이 생산되었는데 이는 ‘코발트블루’는 코발트 광석에서 얻어졌다. ‘코발트’라는 이름은 ‘Kobold(요정)’에서 유래되었다. 캄캄한 탄광 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코발트가 꼭 요정의 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발트 블루를 즐겨 다루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반 고흐(van Gogh)다. 그는 그 색을 매우 신성한 파랑으로 만든 이다. 한편 칸딘스키는 「예술의 정신성에 관하여Uber as Geistige in der Kunst」라는 글에서 “파랑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고 썼다. 이처럼 화가들이 특정 색을 의도적으로 다루는 일은 자신의 온몸으로, 감각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일이다.
남상운은 결국 신비롭고 신성하며(한) 가상의 상태를 블루라는 색상을 빌어, 그리고 음을 상징하는 달을 연상시키는 연잎의 둥근 원형의 형태와 결합해 내면서, 그리고 유화물감의 점성을 죽이고 습성의 상태로 만들어 모든 것을 흡입해내면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 결과 그의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가로지르며 연잎이면서도 그것과는 무척이나 다른 낯선 또 다른 존재를, 관능적으로 흔들리며 다가오는 이상한 색채 덩어리를 안겨준다.
그로 인해 이 작가가 재현한 연/연잎은 기존 한국미술 속에서 빈번하게 접했던 익숙한 연 그림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특이한 감각을 발산하고 있다. 지나치게 익숙한 연에 관한 도상학적 해석이나 의미의 맥락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관습적인 기호에 기우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연잎 자체를 사실적으로만 재현하는 것도 아닌 자리에서 기이하게 자리한 그림이다. 재현과 가상의 사이에서,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런 연잎이 신비스럽게, 눈이 시리게 푸른 덩어리로 유동한다.